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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집4_ 위로 외 19편

항일 민족 시인(抗日民族詩人)인 윤동주는 1917년 12윌 30일에 북간도 명동촌(北間島明東村)에서 윤영석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兒名)이 해환(海換)인 윤동주는 명동 소학교(明東小學校)와 용정(龍井)의 은진 중학(恩眞中學)을 거쳐 1941년에 연회전문학교(현재의 연세대학교)를 졸업했으며, 도일(渡日)하여 릿쿄오(立敎) 대학 영문과에 입학했으나, 곧 도요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로 전학하였다. 윤동주는 방학 중에 귀국하기 전인 1943년 항일 민족 운동의 사상범(思想犯)으로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2년의 언도를 받고 큐우슈우(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45년 2월 16일에 옥사(獄死)하였다. 그의 유해는 고향인 용정에 묻혔고, 1968년 11월 2일에 연세 대학교 캠퍼스에 그의 ..
항일 민족 시인(抗日民族詩人)인 윤동주는 1917년 12윌 30일에 북간도 명동촌(北間島明東村)에서 윤영석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兒名)이 해환(海換)인 윤동주는 명동 소학교(明東小學校)와 용정(龍井)의 은진 중학(恩眞中學)을 거쳐 1941년에 연회전문학교(현재의 연세대학교)를 졸업했으며, 도일(渡日)하여 릿쿄오(立敎) 대학 영문과에 입학했으나, 곧 도요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로 전학하였다.
윤동주는 방학 중에 귀국하기 전인 1943년 항일 민족 운동의 사상범(思想犯)으로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2년의 언도를 받고 큐우슈우(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45년 2월 16일에 옥사(獄死)하였다.
그의 유해는 고향인 용정에 묻혔고, 1968년 11월 2일에 연세 대학교 캠퍼스에 그의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이 책은 윤동주 시인의 주옥같은 시를 모았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것이다.
윤동주
윤동주(尹東柱, 1917년 12월 30일~1945년 2월 16일)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시인이자 작가이다. 본관은 파평(坡平), 아호는 해환(海煥)이다.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함경북도 청진시 포항동 76번지이다. 명동촌은 북간도의 척박한 땅이었지만 1899년 함경도 출신의 김약연, 김하규, 문병규 등이 140여 명의 식솔을 이끌고 북간도로 집단 이주한 후 윤동주의 조부인 윤하현 등이 합류하면서 '동방을 밝히는 곳(明東村)'이라는 뜻을 지닌 북간도 최대의 한인촌을 형성했다.

명동학교(明東學校)에서 수학하였고, 평양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 와 서울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를 졸업하였다. 연희전문학교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일본에 건너가 1942년 교토 도시샤 대학 (同志社大學) 에 입학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에 투옥,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7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요절하였다. 사인이 일본의 소금물 생체실험이라는 견해가 있고 그의 사후 일본군에 의한 마루타, 생체실험설이 제기되었으나 불확실하다. 사후에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일제강점기 후반의 양심적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시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비판과 자아성찰 등을 소재로 하였다. 고종사촌형인 송몽규 (宋夢奎) 역시 독립운동에 가담하려다가 체포되어 일제의 생체 실험 대상자로 분류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그의 창씨개명 '히라누마'가 알려져 1990년대 후반 이후 논란이 일기도 했다. 본명 외에 동주(童柱)와 윤주(尹柱)라는 필명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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