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죽느냐, 그놈이 죽느냐 하는 판이다. 그놈이 있는 곳만 말하면 살려 주지.”
채찍을 들고 장화를 신은, 번지르르한 이 두 명의 사나이도 역시 얼마 뒤에는 죽을 인간이다. 나보다 좀 늦을지는 몰라도 별로 멀지는 않다. 그런데 그놈들은 서류 이름을 찾기에 골몰하고 다른 사람들을 못살게 굴어, 투옥하거나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깐에도 서반아의 장래에 대해서, 또 다른 문제에 대해서 의견을 가지고 있다. 놈들의 자질구레한 행동을 보니 내게는 불쾌하고 우스꽝스럽게 여겨졌다. 아무리 해도 놈들과 같은 심정이 돼 볼 수가 없고, 놈들이 미친 놈으로만 생각되었다.
그 똥똥한 사나이는 제 장화를 채찍으로 치면서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민첩하고 사나운 야수와 같은 티를 내려고 모든 행동을 일부러 꾸며 대는 것이었다.
장 폴 사르트르
‘장 폴 사르트르’(1905~1980)가 20세기의 사상과 문학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는 인간을 보는 새로운 눈을 마련해 주고 격동하는 세계에 대처하는 방법을 찾아내려고 애써 온 사람이다. 우리가 그의 견지에 동의하건 안하건, 서구 지성의 가장 중요한 한 존재로서의 그의 위치를 아무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 작품 ‘벽(壁)’(1939)은 그의 문학작품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걸작이다. 그 유명한 스페인 내란(1936)을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작품의 주안은 전쟁 그 자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르트르’가 이 작품에서 보여주려고 한 것은 ‘죽음’을 앞두고 있는 인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극한 상황 하에서의 인간의 양태에 관한 연구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자신과 그 인물들의 상호관계를 통해서 매우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으면서도 스토리 자체에 무리가 없고 전통적 수법을 사용하고 있어 읽기에 매우 재미있다. 독자들은 쉽고도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는 이 단편에서 자신의 가능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또한 ‘사르트르’의 전체상을 파악하기 위한 손쉬운 서문과 같은 역할을 해 주기도 할 것이다.